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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아시아 경제…

'서해시대' 밀물처럼 밀려온다

한국, 화물중량의 96% 항만 거쳐
'中 관문' 인천항·평택항 역할 ↑
코로나 사태에도 실적 고공행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중국 중심의 아시아 경제가 주목받으면서 대한민국 물류의 중심지로 인천항과 평택·당진항(이하 평택항)이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천항과 평택항은 G2로 부상한 중국 교역의 주요 관문이기 때문이다.

인천항은 국내 6대 항 중 2위로 부상하며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다. 평택항은 수출입 물동량은 5위에 불과하지만 기업들의 생산거점이 밀집돼 자동차,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대중국 및 동남아시아 교역의 전초기지로 떠오르고 있다.

수도권의 관문역할을 하고 있는 인천항은 2014년까지 광양항에 밀려 3위 컨테이너항이었으나 2015년 광양항을 제치고 2위 항만을 유지해오고 있다. 지속적인 물동량 증가에 컨테이너 부두 확장 및 수도권 컨테이너 물류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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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 오늘이 있기까지

민족 희로애락 함께한 '전통항구'

대중국 교역 순풍 타고 괄목상대

백제·고려 해상교역 관문… 조선 '해금정책' 침체
일제강점기 무역항 기능 강화 '조수간만의 차' 극복

한반도와 중국에 둘러싸인 황해와 맞닿아 있는 인천은 과거부터 '해양 교역도시' 역할을 해왔다. 백제 전성기였던 근초고왕 때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이용한 해상교통로는 인천에서 출발해 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둥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登州航路)'였다.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펼친 고려시대에 인천은 개경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꾸준히 발전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침체기에 들어갔다.

조선이 황해의 해상교통을 전면 금지하는 등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을 펼쳤기 때문이다. 사신의 왕래와 대외무역으로 발전했던 항구와 포구는 기능을 상실했고, 인천은 한동안 한적한 어촌 도시에 머물렀다.

인천은 개항이 이뤄지면서 해양 교역도시로 다시 주목받게 됐다. 인천은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한다. 일본의 조선 장악과 대륙 진출을 위한 강제적 개항이었다. 인천항은 일본의 조선 지배 전진기지로 사용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국제 무역항 기능을 강화한다.

인천항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 썰물 때 대형 선박의 접안이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였던 1918년 최대 4천500t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갑문식(閘門式) 제1선거(dock)가 만들어지면서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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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완공된 인천항 갑문 제1선거(dock).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인천항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인 인천항은 항만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교역 시장이 확대되고, 운송수단이 다변화하는 산업화 시대는 인천항 발달의 계기가 됐다. 정부가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정책 중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인천항에 대한 투자도 증가했다.

1974년 제2선거가 완공되면서 최대 5만t급 선박을 내항에 수용할 수 있게 됐고, 한진과 대한통운의 민간 자본을 유치해 우리나라 최초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내항 4부두에 조성했다. 이후에도 하역 설비 보강 등 새로운 항만시설을 구축해나가면서 꾸준히 성장했다.

1992년 한중수교는 인천항 무역 환경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한중 양국의 교역은 수교 이후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한국의 대중 수출은 1992~2001년 동안 연평균 24% 성장했는데, 한국 총수출의 연평균 증가율(약 7.8%)보다 3배 이상 높았다.

역사적으로 대중국 교류의 중심 역할을 해 온 인천도 수교 직후 중국에 대한 수출이 200% 이상 증가했고, 매년 두 자릿수의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다. 중국은 1993년부터 인천항의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Incheon Port

평택항 오늘이 있기까지

외환위기 딛고 태어난 '젊은항구'

'인천항 그림자' 지우고 독자성장

1980년대 말 서해안 주목 받으면서 본격 개발 추진
개발초기 '대체항' 여겨져 화물분담 수동적 역할만

경기도 유일 국제교통(물류)시설인 평택·당진항(이하 평택항)은 수출 중심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평택항 개발은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전까지는 수도권과 경부선 축을 중심으로 한 내륙 위주의 국토 개발이 주를 이뤘다면 이 시기부터는 무역 거점으로 평택항을 비롯한 서해안 지역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1992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한중수교로 평택항 개발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중국과의 지리적 접근성을 바탕으로 한중간 교두보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막중한 역할이 부여된 것이다.


평택항은 1986년 12월5일 항만법 시행령에 의해 무역항으로 개항됐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평택항의 부두 시설이라곤 유류를 취급하는 '돌핀 부두'가 전부였다. 일반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항만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호안(침식 방지 구조물), 안벽 축조 등 항만 기초 공사를 다졌고, 1997년 동부두 외항 일반 부두 4개 선석이 준공되면서 무역항의 모습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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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자동차 전용부두 준공.

개발 초기 평택항은 근거리에 위치한 인천항의 '대체 항' 정도로 여겨졌다. 공업항으로서 인천항을 통해 드나드는 수도권 화물을 분담하는 다소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1995년 평택항 종합개발 기본계획에 따라 추진된 평택항 개발은 항의 외연을 확대해 나가는 역사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인천항의 대체 항에서 독자적인 공업항으로, 다시 배후 지역과의 연계 등을 꾀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업항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다. 특히 1997년 IMF(금융위기) 사태 당시 평택항은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평택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던 시기와 IMF 사태가 맞물리면서 재원 부족 문제가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특히 62선석으로 계획된 개발 규모 가운데 민간투자 방식으로 진행된 절반 이상이 사업 자체를 포기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평택항 개발이 무산될 수 있던 상황을 반전시킨 건 지자체의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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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eongtaek Port

인천항 평택항 물동량 현황

(2016 ~ 2020. 10)

인천항 - 컨물동량, 2000년 이후 5배 증가

​평택항 - 자동차 처리실적 '10년 연속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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